EH 마을공동체
“EH 통합복지 타운형 마을 공동체” 구축을 위하여
(이하 EH 마을공동체)
EH 마을 공동체 구축 취지문
1.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문제들로 인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청년들의 일자리 부족과 청년들의 방황은 이 사회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청년들이 결혼과 직장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꿈 마저도 포기하도록 내몰리고 있으며, 이러한 틈새를 사이비 종교 집단들이 파고들어 유약한 상태에 놓인 청년들을 미혹에 빠트리고 있다. 청년세대와 더불어 노년 세대 또한 어려움 속에 놓이기는 마찬가지다. 노년 세대는 수명이 연장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하는 회의적인 전망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다. 선물로 주어진 우리 삶은 축복이 아니라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린 고뇌와 두려움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2.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 청년 세대들의 실업과 방향성 상실, 그리고 노년 세대들의 고독과 절망에 대해 -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경제발전을 도모해왔다. 경제발전을 이루어내면 모든 세대가 겪는 어려움들은 저절로 해결될 수 있을거라는 소박한 환상에 젖어서 경제발전에 온 희망을 걸고 매진해왔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을 여러 현상들이 증명하고 있다. 경제가 발전되면 발전될수록 청년들은 더욱더 궁핍으로 내몰리고 어르신들은 소외와 고독으로 내몰리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했으며, 경제발전이라는 표피적인 해결책은 한계에 다다랐다.
3. 1970-80년대에 비해 오늘날 우리는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사는 청년들은 과거 시대의 청년들만큼,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경제적인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 이런 아이러니 한 현상이 왜 벌어졌는가? 몇몇 정치인들은 오늘날 비혼 문화의 세태를 비난하며 청년들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이라고 그 탓을 청년 자신에게 돌린다. 그러나 문제 원인을 청년들에게 돌리는 것은 너무 안일한 상황 인식의 결과이다. 지금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핵심적인 이유는 예전보다 상대적으로 더 빈곤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청년세대는 과거에 비해 금전적으로 수입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결혼을 하면, 수입에 비해 지출해야 할 곳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났다. 이러한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맞벌이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입-지출 사이의 불균형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청년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지출이 줄어드는 삶의 구조가 아니라면 수입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시대의 삶의 구조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잘못 설계되어 있다.
4. 예전에 노년세대의 문제는 그다지 크게 대두되지 않았다. <인생 칠십 고래희> 라는 말처럼 70세까지 사시는 분이 드물기도 했지만, 장수하시는 분들은 대가족의 유대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소외와 고독 속에 방치되지 않았다. 우리 시대는 대다수의 분들이 칠십 세는 기본으로 사시고, 그 이상의 장수를 누리고 있다. 예전에 소수의 분들만 누리는 장수의 축복을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어르신들이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축복으로만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년의 삶이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며 살기가 어렵고, 많은 분들이 고독하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독거노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즐거움이 없이 노년생활이 고독하게 견뎌내야 하는 삶이 된다면, 생명 연장은 축복이 아니다. 또한 노년의 삶이 건강이 나빠져 거동을 제대로 못하거나 중병이나 치매로 고생한다면 이것은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린다.
5. 우리 시대는 지금 마을 공동체를 파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다. 과거의 대가족제도, 그리고 마을 공동체는 세대 간 결속을 다지고 어려운 순간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대가족제도나 마을공동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삶을 지탱하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효과적인 구조였음을 지금에 와서 우리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산업사회는 가족제도의 중심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동시켰다. 또한 마을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대신 서로 모여 살아가지만 흩어진 모래알처럼 효용성 없는 아파트 문명을 만들어냈다. 경제적인 효용의 가치를 따르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대가족과 마을 공동체가 지닌 상생의 가치을 상실하게 되었다. 상생의 가치을 잃게 되면 소외와 고독의 문제가 만성화되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과거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해결했던 일들이 모두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일들로 바뀌어 늘어나는 삶의 비용들을 감당하기 힘든 처치가 된다. 늘어나는 비용들을 국가재정으로 감당하려고 하지만 감당해야 할 비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면 국가도 파산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6.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생명이 부여된 이유는 우리 영혼이 하느님의 집이 되어 그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시기 위함이다. 하느님이 머무셔야 우리 영혼이 거룩해지고 온전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필요한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고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서이다. 이로써 우리 인간의 삶이 서로를 통해 지탱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건강하게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생의 집이 되어주는 사회가 될 때, 그 사회는 ‘상생의 집’으로서 본래적인 공동체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생의 집으로서, 가족공동체, 마을 공동체가 견고해져야 그 안에서 연약한 생명들이 양육되고 보호받을 수 있다.
7. 우리는 이 시대의 부서진 상생의 집들을 어떻게 하면 복원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것은 우선 연약한 생명들을 보호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동체의 첫 번째 사명은 연약한 생명을 돌보는데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인, 장애인, 사회적 취약계층들을 돌보는 일을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상생의 집’을 복원하는 일은 미래의 주인공이 될 청년세대를 보호하려는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 청년들은 연약한 생명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가정공동체의 핵심주역으로 그리고 미래에 노년 세대를 지탱해 줄 세대이기에 튼튼하게 커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이 필요한 계층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필요한 일들을 2014년에 설립된 <생명 상생 평화 네트워크> 아래, <EH 사회적 협동조합>, <생명살리기 안심먹거리 협동조합>, <프티플뢰르 사회적기업>을 통해 미소한 노력이지만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그 일을 함께 해 오고 있다. 예컨대 연약한 생명을 돌보는 일, 청년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일, ‘상생의 집’으로서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 그리고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정신에 기초하여 하느님이 머무시는 우리 내면의 영혼의 집을 수리하고, 우리 함께 살아가는 사회 공동체로서 상생의 집을 복원시키고, 온 생명체가 살아가는 지구 공동의 집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8. 이 시점에서 이런 일들이 보다 역동적으로 추진되고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EH 마을공동체 >구축사업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구축사업이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마을을 만들기 위해 건축물을 세우는 것 뿐만 아니라 부서진 공동체의 회복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효용중심에서 가치중심의 사고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순차적인 일의 방향성과 로드맵을 정하고 그것에 따라 역량을 결집시켜 한걸음 한걸음 우직하게 실천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상생의 집’으로써 마을 공동체가 점점 더 성장하게 된다면 연약한 생명들이 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보다 더 안전하게 양육되고 우리들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받고 위안을 주는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추구하는 정신, 즉 “모든이에게 건강을! 모든이에게 온전함을! (Everyone Health! Everyone Holy!)"이라는 슬로건이 구호로만 남아있지 않고, 살아있는 공동체 안에서 숨 쉬게 될 것이다.